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톨트 브레히트 (문단 편집) == 애증의 대상, [[동독]] == 앞서 언급하였듯이 브레히트는 망명생활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서독과 동독, 두 개의 독일 중 사회주의 진영에 있던 [[독일민주공화국]]을 선택했다. 브레히트 외에도 아나 제거스(독일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소설가, '일곱번째 십자가'로 알려져있음) 등 다수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독일 땅에 세워진 새로운 '사회주의' 국가로써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했다. 20세기 초중반부터 자유주의 우파 국가들은 공산주의를 배제시키기 위해 당시에는 제3의 물결이란 이름으로 떠오르던 파시즘을 공공연히 용인하거나 밀어주기도 했었는데, [[파블로 피카소]]같은 예술계 지식인들이 앞장 서서 이러한 기조에 반대해 사회주의 노선의 조직들을 택했다. 베르톨트 브레히트 역시 나치 집권 이전부터 독일 공산당 등 좌파 정치 운동을 지지하고, 이에 관여해온 급진적 좌파였던만큼 '사회주의' 국가를 표방한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한 것이다. 독일민주공화국은 동독을 선택한 브레히트에게 연극계 스타로써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. 브레히트에게는 당시 베를린의 최고 극장 중 하나인 '베를린 앙상블'이 주어지는 등 작품활동을 위한 환경에 있어 독일민주공화국 당국의 전폭적 지원이 이루어졌다.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동독 당국의 문학계와 예술계에 대한 검열을 냉소하고 조롱했다. 브레히트는 독일민주공화국 체제와 더 나아가 소련 [[이오시프 스탈린|스탈린]] 체제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공공연히 풍자했다. 특히 [[1953년 동독 봉기]]의 진압을 지지했지만 정부에도 실망하여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했고 조롱했다. 정부가 보기에 인민이 못마땅하다면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야하지 않겠느냐며 조롱조로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한 것이다[* '해결 방법'의 내용]. 하지만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반공주의자로 전향하거나 독일연방공화국을 지지하진 않았다. 어쨌든 자유주의 세력들에 의해 파시스트 세력들이 자라나고, 그 결과가 [[제2차 세계 대전]]이라는 점을 똑똑히 알고 있던 그에겐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이 서방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과 그 후원국들의 자본주의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. 만약 브레히트가 서독에 살았다고 해도 당시 [[네오나치]]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 하던 독일연방공화국도 곱게 봤을 리가 없다. 여기다 브레히트가 품고 있던 스탈린주의-소련 중심 관리 체제에 대한 불만은 68 혁명과 [[프라하의 봄]]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사망한 브레히트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다. 심지어 [[헝가리 혁명]](1956년 10월) 조차, 브레히트 사망 이후에 일어난 일로서, 서유럽 공산당들이 소련 공산주의와 노선을 달리하기 전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